싹
1995. 5. 19. – 8. 20.
미술관 옛 터
싹
새로 개관할 아트선재센터 자리에 원래 있던 개인 집을 이용해 장소 특정적 전시로 기획된 것이 《싹》전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전통 한옥, 일제시대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내부 구조, 살면서 증축한 서양식 건물이 혼재되어 있는 이 집은 그 자체로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대문 쪽으로 우뚝 서 증축된 서양식 건물은 한옥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데, 이는 한일합방, 광복, 6.25를 거치면서 일본과 서양 문화에 휩싸여 자신을 찾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 하다. 우리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애쓰지만 무너져 가는 전통과 무분별하게 유입된 일본과 서양문화 속에서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
기본적인 의식주에서부터 정신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느끼는 가치관의 혼돈은 미술 에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초창기 많은 한국의 화가들은 일본에 전달되어 한 번 굴절된 서양화를 다시 일본으로부터 배워왔다. 이후 문화 교류가 진행되면서 작가들은 또 다시 미국적인 작품에 익숙해졌다. 80년대 민중미술 운동과 더불어 ‘한국’, ‘우리사회’, ‘나 자신’ 이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중미술은 그 빛을 잃었고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여러 작은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90년대 작가들의 특징은 어떠한가? 그들은 민중미술의 영향을 받아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으나, 민중미술과는 달리 직접적이지 않은 간접적 방법으로 정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분야를 다룬다.
이런 신세대 작가들의 특성을 보여주고, 작가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전시가 바로 《싹》전이다.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멸균된 하얀 벽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살던 공간 안으로 미술을 끌고 들어가, 곧 없어질 장소에 작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장소에 맞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다는 점이 이 전시의 개념이다. 한옥이라는 전통 가옥 안에서 전통에 대해 다시 한 번 작가로써 생각해 보고, 이를 자신들만의 언어로 표현해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 혹은 우리 것이 어떻게 변화되었나, 외국인에 의해 잘못 인식된 것이 다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나, 그리고 한국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는데 한국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트선재센터 개관을 앞두고 숙고해보고자 한 전시였다.